전중윤회장의  삼양라면

라면의 탄생

고 전중윤 삼양회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5.16혁명으로 “배고픈 국민에게 밥을 먹여주겠다”고 국가재건 사업을 벌일때 값싸고 영양가 고른 라면을 개발했다. 

1961년, 6.25 정전후 배고픈 국민들이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 주변에서 꿀꿀이 죽을 먹기위해 늘어선 행렬을 보고 10원짜리 ‘국민식량’ 개발을 착상했다.

전중윤 회장은 식품산업과는 거리가 먼 전문 금융인이었다. 

제일생명보험 경영자로 일본업계를 시찰하던 중 전후 경제개발에 몰두하던 일본인들이 하루 두끼씩 ‘절약근면 식사’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알고보니 구 일본 관동군이 전시 비상식량으로 개발한 ‘건면’을 당시 미국이 잉여농산물로 원조하던 미국 밀가루로 만들어 국민영양식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40대의 보험 경영인은 국가 재건용 절약근면 국민 영양식으로 라면개발에 나선 것이다.

전회장이 일본 시찰을 끝내고 귀국길에 건면 샘플을 들고와 뜯어보니 면 제조기만 구입하면 한국형 건면으로 ‘라면’을 개발할수 있다고 확신했다.


단지 면 제조기 수입을 위한 외화조달이 문제였다.

더구나 한일 국교가 수립되기 이전이라 정부간 대화도 어렵고 상업차관의 길도 없었다. 


이에 전사장이 일본측에게 “6.25 한국전 특수로 일본경제가 부흥했으니 지금은 한국경제 개발을 위해 도와 줄때가 아니냐”고 주장하자 일본사람들이 수긍했다.

‌전사장은 이같은 일본측의 협조약속을 믿고 귀국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면담하여 “배고픈 국민들에게 값싼 영양식을 공급하자면 건면이 제격”이라고 설득했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이 건면 샘플을 시식한 후 “맛도 좋고 영양도 좋다”는 전갈을 보내와 정부 보유불 5만달러를 불하받아 면 제조기를 도입, 삼양라면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즐겨 먹는 식사 대용의 간편 식품  라면의 탄생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 말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 사장이 어느 날 남대문 시장 골목길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그 사장은 호기심이 일었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꿀꿀이 죽’이라고 불렸던 서민들의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모아서 끓인 꿀꿀이 죽은 한 그릇에 5원이었다. 그 광경을 본 보험회사 사장은 참담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며칠 동안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얼마 전 일본 출장에서 맛본 한 음식이 떠올랐다.


기름에 튀긴 마른 국수를 삶고 거기에 육수 분말을 풀어먹던 음식 바로 라면이었다. 

맛도 좋았지만 기름에 튀긴 음식이라 먹고 나서 든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 쌀은 부족해도 밀가루는 미국 원조로 넘쳐나지 않는가!’



사장은 결국 잘 나가던 보험회사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라면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바로 당시 제일생명 사장이었던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1963년 한국에 라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중윤 회장은 사재를 털어 작은 공장을 짓고 일본을 오가며 라면 제조기술을 배웠다.

당시 일본에는 묘조식품이라는 회사가 인스턴트 라면을 한국보다 4년 전에 출시해 판매하고 있었다.

전 회장은 묘조식품 회장을 찾아가 라면 제조기계 판매와 기술전수를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당연히 묘조식품회사의 입장에서 선뜻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묘조식품 회장은 전중윤 회장이 잘나가던 국내 굴지의 금융인이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전회장의 인품을 보고 라면기계 판매와 기술 전수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라면기계를 사올 달러였다.

당시 달러화는 정부가 관리하고 있어서 아무나 구입할 수 없었다.

라면기계 하나에 5만달러. 총 두 대를 살 10만달러를 구하기 위해 전중윤 회장은 정부를 집안처럼 드나들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전중윤 회장은 지인의 소개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게 된다.

김종필 씨는 전중윤 회장의 라면 사업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


당시 쌀은 귀하고 먹을 것은 부족하던 터에 밀가루는 그나마 충분해서 수제비와 칼국수 같은 음식이 국민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고 있었다.

문제는 밀가루만 가지고는 칼로리를 조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전중윤 회장은 김종필 씨에게 라면이 가진 장점을 내세우며 설득을 했다고 한다.


밀가루 200g으로는 얻을 수 없는 500칼로리와 18g의 단백질, 그리고 지방을 라면 200g 한 봉지로 가능하다는 말에,

김종필 씨는 라면 시제품을 먹어보고 나서 두 말 않고 그 자리에서 적극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겨우 겨우 미 농무부가 지원해 주기로 한 10만달러를 전중윤 회장에게 불하해줬다. 하지만 난리가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실을 알고 대노했지요.


그까짓 튀김국수 만드는 기계에 국가가 가진 달러를 다 쓴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어요.

김종필 씨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아주 난감해 했다면서 당시 상황을 저희에게 털어놓았지요.”

삼양라면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 임원의 이야기다. 그는 그러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삼양라면이 막 출시를 앞두고 있을 때였지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식을 해보시더니 ‘이거 좀 닝닝한데…고춧가루와 양념을 더 넣어서 좀 맵게 해봐’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모든 제조공정을 그렇게 바꿨습니다. 그게 일본과 달리 우리 한국의 얼큰한 라면이 나오게 된 계기입니다.”

삼양라면은 1963년 그렇게 첫 선을 보였다.


전중윤 회장은 자신의 기업 이념을 ‘식족평천(食足平天)’으로 정했다.

즉 국민이 배불리 먹으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으로 전중윤 회장은 삼양라면의 가격을 꿀꿀이죽 5원보다 5원 더 비싸고 당시 짜장면 가격 50원보다 40원이 더 싼 10원으로 정했다.

삼양식품공업이 성북구 하월곡동에 공장을 세워 1963년 9월, 국내 처음으로 라면을 생산하여 한그릇에 10원씩 판매하니 금방 불티가 났다. 

처음엔 ‘라면’이란 “봉제용 실이라는 말이냐”는 질문도 나왔지만 라디오 선전을 통해 선전하고 무료 시식회를 갖게되자 입소문이 널리 퍼져 국민영양식의 반열로 올라섰다.

이무렵 모두가 새벽에 출근하여 통금(通禁) 직전까지 야근하던 중노동시절이라 라면은 특근팀의 야식(夜食)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한해와 수해로 집을 떠난 재난민들의구호식으로도 간편하게 공급할수 있었다.

 국방과 경제개발의 제1선을 수시로 시찰하던 박대통령이 휴전선을 지키는 장병들의 ‘불침번 야식’으로도 좋겠다고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삼양라면이 1970년대 경제개발기의 국민 영양식으로 사랑받은 사실은 오늘의 7080세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삼양라면의 인기가 해외교포사회로 전파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면서 한류(韓流)의 원조역할도 맡기 시작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국군 장병들이 미 군납용으로 조달된 일본산 라면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여 당시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미국측과 어려운 협상과정을 거쳐 삼양라면으로 대체됐다.


이로써 한국라면의 원조인 삼양식품의 전중윤 사장은 ‘식품황제’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를 받을수 있었다. 


금융인으로 출발하여 ‘식족평천’의 대의에 도전한 전중윤 창업주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수 있었다.

고인은 강원도 금화군 임남면 달전리 223번지 정선 전씨 양반댁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다.


 넓은 철원평야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일제하에 천재들의 코스로 알려진 선린상고로 유학하여 총독부 체신국 보험과에 취직했으니 일찍부터 출세했다.


8.15직후에도 미 군정청에서 체신부 행정관을 거쳐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 관리 업무도 맡았다.



그뒤 6.25를 거친후 1959년 동방생명 설립에 참여했다가 정부의 요청으로 부실경영에 허덕이던 제일생명 사장으로 발탁되어 경영혁신하던

도중에 라면을 만나 식품황제가 될수 있었다.

전 명예의 기업정신은 라면에 이어 박대통령의 축산진흥 방침에 호응하여 대관령 목장 건설로 ‘식족평천’의 뜻을 펼쳐냈다. 


해발 1,000m의 대관령에는 학술적으로 목장이 안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강원도 태생의 체험을 바탕으로 손수 도끼와 톱을 들고 초지(草地)를 

조성하여 600만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규모의 목장을 일궈냈다.


목장은 우유와 담백질의 공급원으로 라면의 스프를 공급한다. 


더구나 최근에는 대관령 정상에 신재생 에너지원인 풍력발전기를 설치하여 목장과 함께 국민관광지가 되어 각국의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되돌아 보면 고인의 삶은 일편단심이었다고 회고된다. 


고인은 수많은 장서와 독서로 경영어록을 많이 남겼다. 

월간 경제풍월은 지난 2010년 8월, 이건(以建) 전중윤(全仲潤) 명예회장의 ‘정직과 신용’의 일편단심을 ‘한국의 기업가정신’이라고 표상했다. 

전 명예회장은 역시 국민 식량 자급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고인은 '라면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신했지만 곧 국민들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쳤다.

어느 날 삼양라면 공장을 방문한 박 전 대통령은 팔리지 않아 한 편에 수북하게 쌓인 라면 재고를 보았다.

시식을 하고서는 "우리나라 사람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를 더 넣어야겠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 결과 우리 입맛에 맞춘 매운 국물의 라면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밥과 국에 친숙한 소비자들의 입맛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부도 식량 위기 해결을 위해 혼분식 장려 정책을 실시하면서 삼양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지금 개발 방향이 논의 중인 대관령 삼양목장도 사실상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70년대 초 놀고 있는 산지 개발을 위해 전 명예회장을 조용히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전 명예회장은 대관령 땅을 국가에서 50년간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 임대받아 한때 4000마리가 넘는 젖소를 키우며 목축업을 성장시켰다.


이때, 삼양식품이 선정된 이유는

“합리적 기업경영으로 단시일 안에 고도성장을 가져왔고 분식장려로 국민의 식생활 개선에 이바지하였으며

 아울러 미곡절약의 직ᆞ간접적인 효과로 외화절약에 공이 크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은 모두 삼양식품의 기업정신과 소비자의 두터운 신임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소비자를 위한 한층 심화된 노력을 요구하는

채찍으로 받아들여 1970년대의 성숙기를 위한 디딤돌로 삼았답니다.


‘삼양라면’이 성장가도를 달리며 매출이 차츰 신장되고 있던 1966년 가을 어느 날, 당시 전중윤 회장님은 의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곳은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라면의 생산과 판촉으로 정부의 분식장려정책에 협조하고 있는

 전중윤 회장님을 격려한 뒤 자신이 시식한 소감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라면에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술을 마신 뒤 항상 해장을 라면으로 하시면서


얼큰한 국물 맛이 아쉬우셨다며 한국인의 식성은 아무래도 국물 맛이 얼큰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당시 전중윤 회장님은 대통령까지 직접 라면에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요,

6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식량부족이 계속되어 정부에서는 여러 각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대안을 강구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기업의 채산성을 맞출 수 있는 업종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분식장려로 식량난 해결에 조금이라도 기여해 보려는 전중윤 회장님의

라면 생산과 보급을 뜻있는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했고,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가뭄이 계속되던 1963년 여름 밤잠을 자지 못하고 비가 내리기를 고대했을 정도로 계속되는

흉작에 근심을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삼양라면’이라는 이 값싸고 영양가 높은 식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전중윤 회장님도 대통령의 생각과 같은 의견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고를 받고 전중윤 회장님은 이를 최대한도로 제품에 반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뜻있는 많은 분들이 ‘삼양라면’의 탄생과 보급을 기업적 차원에서보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의미 있는 경사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화였습니다.

라면의 폭발적 수요증가를 당시의 하월곡동 시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다른 곳에 시설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1963년 9월 라면제조기 2대를 설치하여 국내 최초로 라면 생산에 들어간 삼양식품은 그 동안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1966년 9월에 라면제조기 2대를 추가 도입하고

이듬해 3월 2대를 또다시 추가 설치함으로써 하월곡동의 공장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67년 1월 삼양식품에서는 서울도봉공장 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증대되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차적인 시설증설의 필요성 및 장래 식품공업의 전망을 검토하면서

신규공장의 건설을 세밀히 조감해 보고 미래의 종합식품회사로 가장 적합한 공장부지를 선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라면문화의 창달지이자 미래 종합식품개발의 진원지로서 서울도봉공장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의 도봉동은 도심에서 24km 떨어져 있고, 앞에는 병풍처럼 드리운 도봉산이 그 위용을 드러낸 채

서울시내를 굽어보고 뒤에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의좋게 산자락을 펼쳐 도봉동을 평화롭게 감싸고 있었답니다.



삼양식품이 이와 같이 인가도 없는 허허벌판을 새로운 공장부지로 선정한 데에는 남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삼양식품은 이곳에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도, 희망도 없는 이재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계를 해결해 주려는 뜻에서 입지조건이 좋은 영등포를 


버리고 도봉동을 공장부지로 선정한 것이었습니다.

동봉공장이 건립된 후 삼양식품은 하천 일대 천막촌의 이재민 600~700여명을 파출소에 의뢰하여 선발했습니다.


막상 사원을 뽑아놓고 보니 교육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장교출신을 데려와 선발된 사람들을 훈련시키기로 했습니다.


기본 태도에서부터 청결까지, 전부 목욕탕으로 출근시키고 옷과 신발을 제공하며 한달 정도를 교육하자

상황은 굉장히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 후 비로소 공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떠돌던 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갖게 되자 절망을 딛고 일어서 열심히 일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천막촌이 판자촌으로, 판자촌이 어엿한 가옥으로 바뀌어

안정된 주거환경을 형성해 갔답니다.

이는 삼양식품의 공익을 앞세우는 경영철학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서울도봉공장 이전 이후 삼양식품은 직원들의 후생복지시설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져

하월곡동과 도봉동에 2층 건물의 직원 기숙사를 지어 각종 문화시설을 골고루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두 기숙사의 수용인원은 570여 명이며, 기숙사 생활을 통하여 올바른 사회관과 가치관을 확립하는 한편

문화시설을 갖추어 교양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하였고 생활 자체는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하여

자립정신을 육성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직원 식당 및 탈의장ᆞ목욕탕을 갖추어 식당은 600여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영양사를 채용하여 영양과 기호, 계절 등을 감안한 메뉴로 영양급식에 만전을 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는 점심과 석식에 격일제로 밥과 라면을 급식하고, 간식으로는 우유, 빵 등을 무료로 제공하여

종업원들의 건강유지와 생산성 향상에 힘썼다고 하네요.

이밖에 전체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탈의장과 200여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목욕탕을 갖추어 직원들의 청결생활에도 관심을 두었답니다.

또한 직원 통근버스 운행, 구내매점 운영, 문화ᆞ오락시설 운영, 의무실 운영 등으로 직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직원들의 인격수양과 자질향상을 위한 도서실을 설치하고 4,000여권의 식품관련 도서를 구입ᆞ비치하여

점심시간이나 일과 후 이용하도록 하며 도서대출 편의도 제공하여 기숙사 등에서

차분히 독서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을 위한 각종 운동기구와 영사기 등을 갖춰

정서함양과 명랑한 생활풍토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출처 - 네이버백과사전